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한 바오로 2세 (문단 편집) ==== [[김대건 안드레아, 정하상 바오로와 101위 동료 순교자|103위 순교자]] 시성식 ==== 1984년 방한 때 교황이 서울 [[여의도광장]]에서 거행한 [[김대건 안드레아, 정하상 바오로와 101위 동료 순교자|한국 순교복자 103위 시성식]]은 여러 가지로 파격적인 것이었다. 우선 [[복자]]를 [[성인(기독교)|성인품]]에 올리기 위해 필요한 두 번째 기적 심사를 면제해 주었는데, [[조선]] 시대 [[순교자]]들이 [[복자]]로 시복될 때도 기적 심사가 면제되었지만 이러한 면제는 보통 한 번만 인정되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에, 파격적이라 할 수 있다. 이때 기적심사의 면제 사유로 [[선교사]]가 해당 지역으로 들어가 전파된 것이 아니라, 스스로 신앙을 수용하여 교회를 만든 것을 통해서 면제하였다고 한다. 또한 [[한국 천주교]]의 요청에 따라 성인명을 '성 [[김대건 안드레아]]와 성 [[정하상]]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'로 변경했다. 원 명칭에는 조선으로 파견되었다가 순교한 [[파리 외방전교회]]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(제2대 [[천주교 서울대교구|조선대목구장]]), [[피에르 모방|모방 나 베드로 신부]][* [[김대건 안드레아]], [[최양업]] 토마스, 최방제 프란치스코를 신학생으로 뽑아 양성했다. 최방제는 유학 도중 병으로 죽었으나, 김대건과 최양업은 무사히 [[신부(종교)|신부]]가 되었다.], 샤스탕 정 야고보 신부의 이름이 앞에 있었지만, 한국의 성인이 아니라 [[프랑스]]의 성인을 기념하는 것 같다는 [[한국 천주교]]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다. 하지만 무엇보다도 파격적인 것은 [[시성식]]을 바티칸이 아닌 곳에서 거행했다는 것이다. 시성식은 교황이 직접 주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[[성 베드로 대성당]]에서만 거행하는 것이 [[아비뇽 유수]] 시기를 제외하면 수 세기 동안 굳어진 원칙이었지만, 당시 [[한국 천주교]]에서는 "한국 천주교의 첫 성인 탄생이라는 경사를 기념하기 위해, 교황 방한에 맞춰 시성식을 한국에서 열 수 없겠느냐"고 교황청 시성성에 문의했다. 한국 순교복자 103위 시성을 위해 매우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던 시성성이었지만, 시성식 장소 문제에 대해서 만큼은 '[[바티칸]] 아닌 곳에서 열리면 다른 지역 교회와의 형평성 문제 때문에 그 상징성이 퇴색할 수 있다'는 이유를 들어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. 그런데 시성성의 입장과 상관없이 요한 바오로 2세가 1984년 방한 때 시성식을 주재하겠다고 친히 결정하면서, ‘한국에서 거행된 시성식은 어디까지나 1984년 교황 방한 때의 부대 행사이지 주된 행사가 아니고, 시성성의 동의 없이 교황의 의지로 관철한 극히 예외적인 사례이므로 이는 시성식이 [[성 베드로 대성당]]에서 거행되어야 한다는 원칙에 대한 변경이 아니며, 다른 교회가 [[한국 천주교]]를 선례로 들어 자국에서 시성식을 거행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'는 구조가 정립되었다. 실제로 시성성 장관과 차관, 차관보는 [[한국]]에서의 시성식에 참석하지 않았으며, 몇몇 시성 청원인이 [[바티칸]] 외의 지역에서도 시성식이 가능한지 문의했을 때 시성성에서는 '예외는 한 번뿐이며 앞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건 결코 용납할 수 없다'고 답변했다. 하지만 한국에서 거행한 시성식은 수백 년 동안 이어진 '바티칸에서의 시성식'이라는 원칙을 깬 첫 번째 사례로 기록되어 그 후 바티칸 아닌 다른 곳에서 시성식을 거행하도록 만든 단초가 되었다. 예를 들어 2015년 [[스리랑카]]에서 [[프란치스코 교황]]이 집전한 시성식이 거행되었다. 성 요셉 바즈 신부로 서기 1651년 [[인도]] [[고아(인도)|고아]] 출생. 성 필립보 네리가 설립한 오라토리오 수도회에 입회 후 [[사제(성직자)|사제]]가 되어 [[스리랑카]] 섬의 [[선교사]]로 파견됨. 당시 스리랑카 섬은 칼뱅파 국가인 [[네덜란드]]가 장악하여 [[가톨릭]]을 혹독하게 박해하고 있었는데, 그 곳에서 전교에 힘을 써 15개의 [[성당]]과 400개소의 [[공소(가톨릭)|공소]]를 구축하는 한편 [[타밀어]]과 [[싱할라어]]로 [[복음]]을 [[번역]]하는 작업을 하였다. 또한 [[천연두]] 희생자들을 돌봄으로써 [[불교]] 신자인 왕의 신임을 얻어 [[선교]] 자유를 얻었다. 1711년 1월 16일 칸디에서 사망했다. 1995년 1월 21일 시복됐다. 2015년 1월 14일 [[시성]]됐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